월요일 오전 10시, 사내 메신저 슬랙이나 카카오톡 업무방을 들여다보면 매주 어김없이 반복되는 익숙한 풍경이 있습니다. 여러 프로젝트 채널마다 기획서, 디자인 시안, 고객 응대 초안이 올라와 있지만 대화의 마지막 문장은 거의 한 사람을 가리키며 멈춰 서 있습니다.
"A 과장님, 바쁘시겠지만 이것 한 번만 봐주시면 바로 고객사로 넘기겠습니다."
"B 수석님이 아직 코멘트를 안 주셔서 다음 단계 개발로 못 넘어가고 있어요."
기획서도 완성됐고 실무진의 작업도 끝났지만, 그 직원이 한마디 얹기 전까지는 업무가 단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정작 그 직원의 캘린더는 아침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빈틈없이 미팅으로 꽉 차 있고, 메신저 알림은 1분마다 쉴 새 없이 울려댑니다. 밤 9시가 넘어서야 그 직원이 피곤에 지친 눈으로 하나둘 남긴 피드백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팀의 시계가 다시 돌아가기 시작합니다. 매일 야근하며 온갖 질문에 답해주는 그 성실한 직원은 팀을 살리고 있는 걸까요, 아니면 팀의 숨통을 조이고 있는 걸까요? ^^;
겉으로 드러난 증상과 손쉬운 오진
조직에서 이런 정체 현상이 심해지면 리더들은 대개 두 가지 손쉬운 오진에 빠지기 마련입니다. 첫 번째 오진은 그 일 잘하는 핵심 직원의 성향을 탓하는 것입니다. 저 친구가 완벽주의 성향이 너무 강해서 일을 손에서 놓지 못한다거나, 은근히 모든 일에 자기 손자국을 남기며 영향력을 독점하려 든다고 의심하는 식이죠. 실제로 "네가 모든 걸 쥐고 있으려 하니까 병목이 생기는 것 아니냐"며 그 직원의 관리 욕심이나 과도한 책임감을 질타하는 리더를 코칭 현장에서 왕왕 봅니다.
두 번째 오진은 반대로 주변 동료들의 자질을 탓하는 쪽입니다. 다른 팀원들이 주도성이 없고 게으르며, 스스로 판단할 줄을 몰라서 매번 A 과장 치맛자락만 붙잡고 늘어진다고 혀를 차는 것이죠. 저 역시 예전 팀장 시절에 '왜 우리 팀은 A가 없으면 아무 결정도 못 내릴까' 하며 팀원들의 역량 부족을 탓했던 부끄러운 기억이 있습니다만, 이는 조직의 본질을 완전히 거꾸로 짚은 것입니다.
냉정하게 따져보면 이 현상은 개인의 성격 결함도, 동료들의 나태함 때문도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조직에서 가장 헌신적이고, 가장 친절하며, 동료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는 탁월한 인재가 비공식적인 해결사 역할을 도맡다 보니, 어느새 시스템 전체의 흐름을 가로막는 제도적 병목(institutional bottleneck)으로 변질되어 버린 구조적 참사입니다. 사람을 탓하기 전에 이 악순환이 조직 안에서 어떻게 싹트고 자라나는지 세 가지 층위의 원인을 차분히 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원인 1: 착한 직원의 '선의의 함정'과 자기조절 자원 고갈
가장 먼저 들여다볼 대목은 도움을 베푸는 개인의 심리적 자원입니다. 남을 돕는 행동은 조직을 지탱하는 미덕으로 칭송받지만, 그 이면에는 무시무시한 대가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플로리다 대학교의 클로디아나 라나이(Klodiana Lanaj) 교수 연구진이 2016년 Journal of Applied Psychology에 발표한 연구는 이 메커니즘을 명쾌하게 증명합니다. 연구진이 3주간 직장인들의 일일 다이어리를 추적 관찰한 결과, 동료들의 도움 요청에 응하는 행위는 개인의 자기조절 자원(self-regulatory resources), 즉 정신적 에너지와 의지력을 빠르게 고갈시키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특히 흥미로운 점은 평소 이타적 동기가 강하고 남을 돕는 데 진심인 직원일수록 자원 고갈의 속도가 훨씬 가파르고 회복 탄력성은 되레 낮았다는 사실입니다.
이와 궤를 같이하는 또 다른 학술 연구가 있습니다. 오클라호마 대학교의 마크 볼리노(Mark C. Bolino) 교수가 이끈 연구진이 2015년 Journal of Applied Psychology에 발표한 논문에서는 이를 시민 피로(citizenship fatigue)라는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공식 직무 범위를 넘어 조직과 동료를 위해 자발적으로 헌신하는 행위(조직시민행동)가 반복되면, 직원은 보람을 느끼기보다 극심한 피로와 스트레스에 짓눌리게 된다는 분석입니다. 매번 웃는 얼굴로 "제가 도와드릴게요"를 외치던 에이스가 어느 순간부터 멍한 표정으로 메신저 확인을 미루고, 결국 답변이 며칠씩 지연되는 이유는 그가 불친절해져서가 아니라 뇌의 에너지가 바닥났기 때문입니다. 착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상이 더 많은 일과 만성 피로라니, 실로 씁쓸한 역설이 아닐 수 없습니다. ㅜㅜ
- 리더가 확인해야 할 관찰 신호: 그 직원이 정규 업무 시간에 본인의 핵심 과업을 진행하지 못하고, 퇴근 후나 주말에 혼자 남아 보고서를 작성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제가 잠깐 봐드릴게요"라는 말을 달고 살면서도 표정은 나날이 어두워지고 있습니까?
- 리더가 스스로에게 던질 질문: "우리는 그 직원의 친절을 공짜 자원처럼 착취하며, 그가 정당하게 거절할 권리를 조직 차원에서 보장해 준 적이 있는가?"
- 구조적 대응 방안: 도움 요청을 받는 시간을 캘린더에 별도로 지정(오피스 아워 운영)하게 하고, 그 외의 시간에는 온전히 본인 업무에만 몰입할 수 있도록 리더가 직접 방패막이가 되어주어야 합니다.
잠깐 다른 업계의 장면 하나를 떠올려봅니다. 비행기가 1분에 한 대씩 뜨고 내리는 대형 공항의 관제탑에서는 아무리 뛰어난 베테랑 관제사라도 일정 시간 이상 연속으로 마이크를 잡지 못하게 법으로 강제합니다(미 연방항공청의 경우 최대 10시간으로 제한). 한 사람의 순간적인 인지 과부하가 공항 전체의 마비를 부를 수 있기 때문이죠. 하물며 매일 수십 가지 의사결정이 오가는 지식 집약적 조직에서, 에이스 한 사람의 선의와 인지 능력에 모든 검토를 의탁하는 것은 관제탑을 단 한 사람에게 맡겨두고 방치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원인 2: 상위 3%에게 쏠리는 '협업 과부하'와 네트워크 병목
두 번째 원인은 개인을 넘어 조직의 네트워크 구조에서 발생합니다. 뱁슨 칼리지의 롭 크로스(Rob Cross) 교수와 와튼스쿨의 애덤 그랜트(Adam Grant) 교수 등이 2016년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에 기고한 기념비적 논문 Collaborative Overload에서 오늘 우리가 마주한 문제의 뿌리를 정확히 꿰뚫습니다. 저자들은 수많은 글로벌 기업의 네트워크를 분석한 결과, 조직 내에서 이뤄지는 가치 있는 협업의 20%에서 35%가 단 3%에서 5%에 불과한 소수 핵심 인재에게 집중되어 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이 논문에서 저자들은 이번 호의 주제이기도 한 뼈아픈 경고를 던집니다. "선순환으로 시작된 협업이 머지않아 악순환으로 치닫는다. 유능하고 친절한 직원은 곧 조직의 제도적 병목이 된다. 그들이 한마디 얹기 전까지는 업무가 전혀 진행되지 않기 때문이다(Soon helpful employees become institutional bottlenecks: Work doesn’t progress until they’ve weighed in)."
팀에 무슨 일만 생기면 모두가 그 직원을 찾아가 묻습니다. "이거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 문구 괜찮을까요?" 질문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5분이면 끝나는 손쉬운 조언 구하기지만, 그 질문을 20명에게 동시에 받는 사람은 하루 종일 타인의 맥락에 끌려다니며 산산조각 난 집중력을 부여잡아야 합니다. 결국 그 직원은 온갖 회의에 불려 다니느라 정작 가장 중요한 판단을 내려야 할 시점에는 지쳐 쓰러집니다. 제가 보기에 진짜 위험한 것은 협업이라는 이름 아래 자행되는 무분별한 의사결정의 집중입니다. 지난 호 [지금리더] 리더가 위험하다(Manager overwhelm) 1에서 가트너 조사를 인용하며 관리자의 75%가 감당할 수 없는 업무량에 압도당하고 있다고 말씀드렸던 맥락과 정확히 맞닿아 있습니다. 관리자뿐만 아니라 실무급의 에이스 직원들 역시 이 협업 과부하의 늪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셈입니다.
- 리더가 확인해야 할 관찰 신호: 팀 내 거의 모든 프로젝트 문서의 참조자(CC)에 그 직원의 이름이 박혀 있습니까? 그 직원이 하루라도 병가를 내거나 휴가를 가면 팀의 결재 라인과 외부 커뮤니케이션이 통째로 올스톱됩니까?
- 리더가 스스로에게 던질 질문: "우리 팀의 업무 흐름도에서 특정 노드 하나에 화살표가 기형적으로 몰려 있는 것을 방치하고 있지는 않은가?"
- 구조적 대응 방안: 업무 관여의 기준을 재정의해야 합니다. 단순히 '알고 있어야 하는 사람(Informed)'과 '직접 결정해야 하는 사람(Accountable)'을 엄격히 분리하고, 불필요한 메신저 태그와 회의 참석을 리더가 앞장서서 걷어내 주어야 합니다.
원인 3: 판단 기준 부재가 낳은 '의사결정 외주화'와 학습된 무기력
세 번째 원인은 가장 구조적이고 뿌리 깊은 문제입니다. 왜 동료들은 굳이 A 과장의 입만 바라보고 있을까요? 겉으로는 그 과장의 안목을 신뢰해서인 것처럼 포장되지만, 실상을 한 꺼풀 벗겨보면 '책임 회피'와 '판단 기준의 부재'가 얽혀 있습니다. 기준이 명문화되어 있지 않은 조직에서는 아무리 사소한 문구 하나를 정할 때도 '과거에 해본 사람'의 감(感)에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만에 하나 결과가 잘못되었을 때 "A 과장님도 괜찮다고 하셨는데요"라는 방패막이를 세울 수 있으니, 동료 입장에서는 스스로 고민하고 책임지기보다 에이스에게 의사결정을 외주 주는 편이 훨씬 안전하고 편안합니다.
이런 악순환이 서너 달만 지속되면 팀 전체에 치명적인 '학습된 무기력'이 뿌리를 내립니다. 실무자들은 더 이상 기획서의 디테일을 치열하게 고민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B 수석이 자기 입맛대로 다 고칠 텐데 뭐 하러 힘을 빼나'라는 체념이 팀을 지배하는 순간, 조직의 지적 성장은 멈춰 섭니다. 지난 호 [지금리더] 직원에게 주도성을: ING에서 소개해 드렸던 네덜란드 ING 은행의 사례를 곱씹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ING는 복잡한 AI 모델을 도입하면서도 직원이 판단 과정에서 배제되지 않도록 8가지 항목의 정책을 세우고 인간의 주도성을 철저히 지켜냈습니다. 에이스 한 사람의 두뇌에 모든 판단을 맡겨버리는 조직은, 알고리즘에 영혼을 넘겨주고 수동적인 작업자로 전락하는 조직과 구조적으로 다를 바가 없습니다.
- 리더가 확인해야 할 관찰 신호: 주니어 직원들이 보고를 올릴 때 대안과 근거를 제시하기보다 "과장님, 이거 어떻게 할까요?"라며 백지상태로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까?
- 리더가 스스로에게 던질 질문: "우리 팀에는 실무자가 에이스의 검토 없이도 스스로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명확한 가이드라인과 성공 기준이 존재하는가?"
- 구조적 대응 방안: 일의 기준을 개인의 머릿속 암묵지에서 조직의 형식지로 끌어올려야 합니다. "A 과장의 컨펌"을 거치게 할 것이 아니라, "A 과장이 과거에 성공시켰던 의사결정 원칙"을 문서로 만들어 팀 전체에 배포해야 합니다.
아직 단정할 수 없는 원인: 가설로 남겨둘 평가와 보상의 그림자
지금까지 개인의 자원 고갈, 네트워크 집중, 시스템의 기준 부재라는 세 가지 층위를 짚어보았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고백하건대, 현장을 둘러보며 쓰면서도 여전히 확신이 서지 않는 미지의 영역이 하나 남아 있습니다. 바로 우리 조직의 '평가와 인정 시스템'이 보내는 암묵적인 신호입니다.
과연 우리 회사는 어떤 사람을 인재로 대우하고 있을까요? 혹시 주말에도 메신저에 접속해 동료들의 불을 꺼주는 슈퍼히어로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면서, 조용히 업무 매뉴얼을 정리해 동료들이 자기를 찾지 않아도 스스로 일할 수 있게 판을 깐 직원은 '눈에 띄는 실적이 없다'며 평가절하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만약 조직의 보상 시스템이 '내가 없으면 안 돌아가는 상태'를 만든 사람에게 더 큰 권력과 높은 고과를 안겨주고 있다면, 에이스 직원 입장에서는 무의식중에 병목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는 생존 전략일지도 모릅니다. 이것은 아직 통계적 데이터로 명확히 검증하지 못한 하나의 가설입니다만, 리더 여러분께서 우리 회사의 평가 테이블을 바라보며 한 번쯤 깊이 곱씹어볼 질문임에는 분명합니다.
병목을 해소하고 조직의 숨통을 틔우는 실천 수순
그렇다면 착한 직원을 살리고 팀의 멈춰 선 바퀴를 굴리기 위해, 리더는 당장 내일부터 무엇을 해야 할까요? 한꺼번에 거창한 혁신을 시도하기보다는 현장에서 부담 없이 적용해볼 수 있는 네 가지 수순을 권해드립니다.
첫째, 에이스의 역할을 '직접 해결사'에서 '가이드라인 코치'로 공식 전환해보시면 어떨까요. 에이스가 하루 종일 남의 문서를 첨삭하고 있는 모습을 보며 "역시 우리 팀의 기둥"이라고 흡족해하시면 안 됩니다. 오히려 "A 과장, 자네가 직접 검토하는 시간을 절반으로 줄이고, 그 노하우를 바탕으로 주니어들이 스스로 점검할 수 있는 체크리스트를 만들어보게"라고 역할을 재정의해주어야 합니다. 해결한 일의 개수가 아니라, '동료를 얼마나 자립시켰는가'를 그의 진짜 성과로 인정해주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 첫걸음입니다.
둘째, '직접 답하기' 대신 '문서 링크 전달하기'를 팀의 그라운드 룰로 못 박아보시기 바랍니다. 동료가 찾아와 질문할 때 에이스가 즉석에서 구두로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것은 단기적으로는 고맙지만 장기적으로는 독입니다. 질문이 들어왔을 때 사내 위키나 노션의 가이드 링크를 툭 던져줄 수 있도록 판을 깔아주세요. 만약 해당 내용이 문서화되어 있지 않다면, 질문을 받은 에이스가 답을 해준 뒤 질문자가 직접 그 내용을 사내 지식 베이스에 정리해 올리도록 규칙을 정하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에이스의 뇌 속에 갇혀 있던 지식이 조직의 자산으로 차곡차곡 축적됩니다.
셋째, 명확한 '의사결정 가드레일'을 세워 실무자에게 권한을 위임해보시길 제안합니다. 모든 사안을 검토받게 하지 말고, 실패해도 조직에 치명적이지 않은 영역(예: 예산 50만 원 이하의 집행, 기존 레퍼런스가 존재하는 디자인 수정 등)은 실무자 전결로 과감히 풀어주어야 합니다. "이 기준 안에 들어오는 일은 A 과장에게 묻지 말고 본인의 판단대로 바로 실행하세요. 결과에 대한 책임은 리더인 제가 집니다." 리더가 이 말을 공식적으로 선언하지 않는 한, 주니어들은 본능적으로 에이스의 결재 뒤로 숨을 수밖에 없습니다.
넷째, 착한 에이스에게 '거절할 수 있는 공식적인 라이선스'를 쥐여주세요. 이타적인 직원들은 동료의 부탁을 거절할 때 극심한 죄책감을 느낍니다. 그러니 리더가 팀 전체에 공표해야 합니다. "A 과장은 이번 분기 핵심 프로젝트 몰입을 위해 비정기적인 업무 검토 요청을 거절할 수 있습니다. 급한 사안은 A 과장이 아니라 저에게 먼저 들고 오세요." 리더가 직접 욕받이가 되어 방패막이를 쳐줄 때, 비로소 에이스는 숨을 고르고 본인의 진짜 과업에 에너지를 쏟을 수 있습니다.
조직의 생산성은 에이스 한 사람의 초인적인 희생으로 지탱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뛰어난 에이스가 자리를 비워도 시스템과 가이드라인에 의해 일이 물 흐르듯 굴러갈 때, 그 조직은 비로소 건강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의 팀에서 지쳐가고 있는 그 착한 직원의 캘린더를 가만히 들여다보시기 바랍니다. 그가 짊어진 짐을 덜어내 주는 것, 그것이야말로 리더가 팀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가장 따뜻하고 현실적인 배려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