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을 넘기다 한 해가 저물어가는 바람을 마주할 때면 조직의 시계는 어느 때보다 가쁘게 돌아갑니다. 11월에 접어들면 기업마다 성과를 매듭짓고 새해 진용을 꾸리는 연말 임원 인사 준비가 본격화되죠. 인사위원회가 열리는 회의실 불빛이 늦도록 켜져 있으면 사내에는 긴장감과 기대감이 감돕니다. 한 해 동안 숱한 변수를 뚫고 목표를 달성해 온 관리자들에게 이 시기는 보상을 기대하는 결정적 순간이죠. "우리 부서는 올해도 목표를 120% 초과 달성했고 잡음 없이 완주했다"며 승진을 자신하는 목소리도 들려옵니다. 해당 영역에서 무결점의 전문성을 증명해 온 '도메인 에이스'라면 이러한 기대는 자연스럽습니다.
하지만 인사 발령 공고가 뜨는 날, 사내에는 뜻밖의 당혹감이 교차하곤 합니다. 누구보다 탁월한 실적을 냈던 에이스 관리자가 명단에서 빠지고, 정량 숫자는 평이했으나 타 부서와의 갈등을 조율하고 신규 프로젝트를 성사시킨 동료가 임원 배지를 다는 일이 벌어지기 때문입니다. 완벽한 KPI 달성이 승진의 보증수표라 믿었던 관리자에게 이는 깊은 좌절을 안겨줍니다. "무엇을 더 증명해야 했는가?"라는 탄식이 터져 나오죠. 왜 최고경영진은 자기 부서에서 완벽했던 리더를 임원 심사에서 탈락시키는 것일까요? 같이 보시죠!
도메인 에이스의 역설: 어제의 성공 공식이 오늘의 덫이 될 때
실무자에서 출발해 팀장에 오르기까지 리더가 조직에서 신뢰를 쌓는 가장 확실한 무기는 '기능적 무결점(Functional Excellence)'입니다. 개발팀장은 견고한 아키텍처로 납기를 맞추는 능력으로, 영업팀장은 분기 매출을 달성하는 돌파력으로, 재무팀장은 오차 없는 결산과 비용 방어로 역량을 증명합니다. 주어진 목표를 엄밀하게 통제하고 타 부서의 간섭으로부터 우리 팀의 자원을 지켜내는 실행력이야말로 유능함의 상징이었습니다.
하지만 바로 이 지점에서 치명적인 착각이 싹틉니다. 중간관리자로서 자신을 에이스로 만들어 준 성공 방정식이 상위 리더로 도약하는 문턱에서도 똑같이 유효할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패스트컴퍼니(Fast Company)의 2026년 10월 28일 자 기사 [The unexpected mistakes that cost executives their next big role]는 임원 도약의 복병으로 '과거 플레이북에의 의존(Relying on Past Playbooks Instead of Contextual Agility)'을 꼽았습니다. 특정 영역에서 성공했던 통제 방식을 상위 역할에서도 고수하려 할 때, 경영진은 그 후보자에게서 치명적인 위험 신호를 감지합니다.
티모시 저지(Timothy A. Judge) 교수 등이 《더 리더십 쿼터리(The Leadership Quarterly)》에 발표한 논문 "The bright and dark sides of leader traits: A review and theoretical extension of the leader trait paradigm"는 리더십 특성의 밝은 면(bright side)과 어두운 면(dark side)을 분석했습니다. 실무 시절 성과를 견인했던 완벽주의와 과업 집착은 초기에는 강점이지만, 복합성이 폭증하는 상위 직급에서는 타협 거부와 타 부서 불신이라는 어두운 면으로 돌변합니다. 어제의 성공 무기가 오늘의 덫이 되는 셈입니다.
사일로의 수호자 vs 전체 최적화의 조율자: C레벨이 바라보는 성과의 진짜 정의
경영진과 인사위원회가 임원 후보자를 평가할 때 던지는 질문은 "당신 부서의 목표 달성률이 몇 퍼센트인가?"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들이 바라보는 시선은 다릅니다. "당신은 자기 부서의 숫자를 만드는 과정에서 조직 전체의 가치를 키웠는가, 아니면 다른 부서의 에너지를 소모시켰는가?" C레벨이 요구하는 역량은 '부분 최적화(Local Optimization)'에 갇힌 기능 관리자가 아니라 '전체 최적화(Global Optimization)'를 이끄는 비즈니스 조율자입니다.
많은 에이스 관리자가 무의식중에 견고한 '사일로(Silo)'를 구축합니다. 마케팅팀은 유입 숫자를 채우려 저품질 리드를 넘기고 영업팀의 전환율을 탓하며, 개발팀은 안정성을 이유로 사업기획팀의 긴급 대응을 차단합니다. 관리자는 "내가 바람을 막아줄 테니 우리 일만 하자"며 방패막이를 자처하죠. 부서원에게는 믿음직한 리더일지 몰라도, 경영진에게 이는 조직을 갈라놓는 참호전일 뿐입니다. 각 부서가 성채에 갇힐 때 전사 비즈니스 가치는 훼손됩니다.
메리 월러(Mary J. Waller) 교수 연구팀이 《아카데미 오브 매니지먼트 저널(Academy of Management Journal)》에 발표한 논문 "Functional Background as a Determinant of Executives' Selective Perception"는 이를 입증합니다. 리더의 기능적 배경은 인지적 필터로 작용해, 자기 도메인의 내부 효율성에만 시야를 가두는 '선택적 지각(Selective Perception)'을 낳습니다. 생산 출신은 원가로만, 마케팅 출신은 브랜드로만 세상을 바라봅니다. 하나의 렌즈에 갇힌 리더는 복합적인 비즈니스 상충 관계를 조율할 시야를 잃게 됩니다.
저자가 일찍이 [지금리더] 중간관리자 구하기에서 짚었듯이, 조직 시스템이 개별 부서의 단기 실적만을 쥐어짜도록 설계되어 있다면 관리자는 생존을 위해 사일로의 성벽을 높이 쌓을 수밖에 없습니다. 타 부서에 자원을 양보하거나 애매한 영역의 책임을 떠안았다가는 당장 자기 부서의 고과가 깎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시스템 안에서 가장 성실하게 성벽을 높이 쌓아 올린 관리자일수록 임원 승진 심사대에 서는 순간 '편협한 시야를 가진 사일로의 주범'이라는 평가를 받게 됩니다.
오늘날 글로벌 기업들이 추진하는 조직 개편의 흐름 역시 이와 궤를 같이합니다. [지금리더] 안타까운 중간관리자의 운명에서 살펴보았듯, 주요 기업들이 중간 계층을 축소하고 조직을 평탄화하는 본질적인 이유는 단순한 비용 절감이 아닙니다. 기능적 칸막이 안에서 상부 지시를 전달하고 자기 영역만을 통제하던 관리자의 기능이 디지털 도구와 AI로 대체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경영진이 임원 자리를 맡기고자 하는 인재는 도메인의 경계를 넘나들며 타 부서와의 상충 관계를 유연하게 조율하는 '맥락적 연결자'입니다. 부서 담벼락 뒤에 숨어 무결점 지표를 자랑하는 리더에게 남겨진 자리는 갈수록 좁아지고 있습니다.
에이스 관리자에서 엔터프라이즈 리더로: 승진 심사 전에 건너야 할 세 가지 다리
그렇다면 연말 인사를 앞두고 한 단계 도약을 준비하는 관리자, 그리고 차세대 리더 풀을 선발해야 하는 경영진은 무엇을 점검해야 할까요? 기능 영역의 에이스에서 조직 전체의 성장을 견인하는 '엔터프라이즈 리더(Enterprise Leader)'로 거듭나기 위해 리더가 건너야 할 세 가지 다리를 제안합니다.
첫째, '부서 KPI'의 방언을 벗어나 '회사의 P&L(손익계산서)'이라는 공용어로 사고를 전환해야 합니다. 도메인 에이스는 "예산을 10% 아꼈다"거나 "목표를 20% 초과 생산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엔터프라이즈 리더는 그 숫자가 전사 손익에 미친 파급력을 먼저 봅니다. 내 팀의 비용 절감이 고객 접점의 품질 저하와 이탈을 부르지는 않았습니까? 내 부서의 초과 생산이 재고 부담과 물류비 증가를 낳지는 않았습니까? 상위 리더로 도약하려면 부서 지표를 넘어 회사의 현금 흐름과 고객 가치에 미친 기여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둘째, '사일로의 방어자'에서 '전략적 양보자'로 정체성을 재정의해야 합니다. 경영진이 주목하는 역량은 자원이 풍족할 때의 질주력이 아닙니다. 이해관계가 충돌할 때 회사 전체를 위해 자기 부서의 기득권을 내려놓을 수 있는가입니다. 유능한 후보자는 전사 승부처 앞에서 "우리 R&R이 아니다"라며 선을 긋지 않습니다. "이 프로젝트가 핵심이라면 우리 팀 핵심 인력을 파견하고 예산을 지원하겠다"며 먼저 손을 내밉니다. 타 부서의 성공을 도와 전체 파이를 키우는 법을 알기 때문입니다. 사일로 수호자는 자원을 쥐고 부서를 지키지만, 엔터프라이즈 리더는 자원을 유통시켜 회사를 살립니다.
셋째, 관계를 도구가 아닌 '조직 맥락을 읽는 센서'로 구축해야 합니다. 패스트컴퍼니가 지적했듯 승진에 실패하는 관리자들은 관계를 거래적(Transactional)으로 대합니다. 필요할 때만 타 부서를 찾고 평소에는 팀원들과만 뭉치죠. 하지만 상위 리더에게 필요한 역량은 조직 안팎의 기류와 변화 신호를 감지하는 맥락 파악력입니다. 이를 위해 재무, 마케팅, 인사, 영업을 아우르는 크로스 펑셔널 네트워크를 다져야 합니다. 타 부서의 병목과 현장의 동요를 입체적으로 읽어내는 리더만이 위기 속에서 조직 전체를 이끄는 지휘자가 될 수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 자신의 모습을 조용히 돌아보시길 권합니다. 나는 오늘 하루 우리 팀의 담벼락을 높이는 데 열중했습니까, 아니면 타 부서와의 다리를 놓는 데 마음을 썼습니까? 회의 테이블에서 내 주장의 근거는 '우리 팀의 편의'였습니까, 아니면 '고객과 회사의 이익'이었습니까? 이 물음에 거리낌 없이 답할 수 있을 때, 임원이라는 역할은 쫓아가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여러분의 어깨 위에 다가올 것입니다.
차세대 리더를 선발하는 경영진에게도 제언을 드립니다. 에이스 관리자가 사일로에 갇히는 것은 '자기 방만 치우라'고 요구해 온 조직 시스템의 탓이 큽니다. 평가와 보상의 틀을 바꿔야 합니다. 부서 단독 지표 비중을 낮추고 협업 기여도와 조율 역량을 핵심 기준으로 공식화해야 합니다. 나아가 순환 근무와 전사 TF 참여 기회를 열어 참호 밖에서 회사의 전체 지도를 그리게 도와야 합니다. 에이스를 소모품으로 쓰지 않고 엔터프라이즈 리더로 키워내는 시스템을 갖추는 것, 그것이 연말 인사를 앞둔 경영진의 본질적인 숙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