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신입에게 일을 맡겨 보면 결과물은 빠르게, 그것도 제법 그럴듯하게 올라옵니다. 그런데 한 겹만 들춰보면 '어...?' 싶을 때가 있죠. "왜 이 방향으로 풀었어요?"라고 물으면 말이 막힙니다. 더 깊이 캐물으면 결국 나오는 말. "저... AI가 그렇게 정리해 줬는데요..." 보고서는 매끈한데 그 안에 '생각한 흔적'이 부족한 겁니다.
저는 이걸 게으름의 문제라고 보지 않습니다. 도구가 너무 좋아서 생기는, 새로운 종류의 문제거든요. 예전 신입은 자료를 못 찾아서 헤맸습니다. 그 속에서 '이 문제가 진짜 뭘 묻고 있지?'를 스스로 정의하는 근육이 길러졌죠. 지금 신입은 헤맬 일이 없습니다. 질문을 던지면 답이 바로 나오니까요. 편해졌습니다. 그런데 그 '편함'이 정확히 어떤 능력을 길러줄 기회를 빼앗고 있는지, 한 번쯤 따져볼 때가 됐습니다.
오늘은 이 문제를 제도로, 그것도 아주 구체적으로 막은 회사 이야기를 가져왔습니다. 글로벌 에너지 기업 셸(Shell)이 신입에게 건 조건은 단순합니다. '문제 정의가 먼저, AI는 그다음.' 같이 보시죠!
빠른 결과물 뒤에 숨은 조직 역량 붕괴
BCG가 2026년 6월 발표한 리포트 When Everyone Uses AI, Companies Risk Losing Critical Skills는 이 현상에 이름을 붙였습니다. '분산형 역량 붕괴'(distributed de-skilling). 한 사람이 무능해지는 게 아니라, 조직 전체에 걸쳐 비판적 사고와 판단력, 그리고 문제를 구성하는 능력이 조용히 깎여 나가는 거죠.
숫자가 제법 묵직합니다. 이미 리더의 50%가 자기 조직에서 이런 역량 저하를 '지금' 관찰하고 있다고 답했고, 60% 이상은 앞으로 3~5년 안에 이게 심각한 위협이 될 거라고 봤습니다. 더 뼈아픈 건, 가장 먼저 위태로워지는 능력이 하필 판단력·문제 구성·창의적 사고라는 점입니다. 장기 성과에 가장 중요하다고 다들 입을 모으는, 바로 그 능력들이요.
(예) 한 중견 고객사의 A 임원은 콜센터 인력의 40%를 챗봇으로 돌리며 분기 보고에 비용 절감액을 자신 있게 적었습니다. 두 분기 뒤, 그 표에는 없던 항목이 생겼죠. 이탈 고객 복구 비용, 재교육 비용, 그리고 급하게 다시 뽑은 경력직 단가. A 임원은 회의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숫자는 줄였는데… 비용은 더 높아졌어요." 절감(?)의 역설입니다.
셸의 해법: 'AI 켜기 전에' 기초 분석부터 만들게 한다
BCG가 소개한 사례에서 셸은 경력 초기 직원에게 'AI를 쓰기 전에 먼저 스스로 문제를 구성하고 기준선(baseline)을 만들라'고 요구합니다. 신입은 일단 자기 머리로 문제를 정의하고, 깔고 들어간 가정을 점검하고, 거친 기초 분석을 만듭니다. AI는 그 '다음'에야 등장합니다. 다듬고, 확장하고, 검증하는 도구로요. 판단의 소유권을 끝까지 사람이 쥐게 한 거죠.
순서 하나 바꿨을 뿐인데 학습의 질이 달라집니다. 먼저 자기 가설을 세워본 사람은 AI의 답을 받아들일 때 비교할 '원본'이 있습니다. '내 생각과 어디가 다르지?', '왜 다르지?'를 따질 수 있게 되는 거죠. 반대로 백지에서 AI부터 켠 사람에겐 비교 대상이 없습니다. 그냥 받아 적을 뿐입니다.
이게 단순한 정신교육이 아니라는 증거도 있습니다. Sun과 동료들이 Journal of Applied Psychology에 발표한 2025년 현장 실험인데요. 한 컨설팅 기업의 직원 약 250명을 무작위로 나눠 한쪽만 업무에 ChatGPT를 쓰게 했습니다. 결과는, AI를 쓴 쪽이 더 새롭고 쓸모 있는 아이디어를 냈습니다. 다만 결정적인 단서가 붙습니다. 그 효과의 크기가 '자기 일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능력'에 따라 갈렸다는 거예요. 생각하는 사람에게 AI는 날개를 달아주지만, 생각을 멈춘 사람에게는 별 도움이 안 됩니다. 셸이 신입에게 '먼저 생각하라'고 강제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그게 AI의 가치를 끌어올리는 전제조건이거든요.
이 관점은 사실 낯설지 않습니다. 지난 호 [지금리더] 직원의 사고를 유지시켜라: J.P. Morgan에서도 다뤘듯, AI를 의사결정자가 아니라 '검증 도구'로 재정의하는 게 핵심이죠. 셸은 그걸 신입 온보딩 단계부터 손에 익도록 설계한 셈입니다.
(예) C HRD 담당자가 신입 교육 과정을 뜯어고칩니다. 기존엔 'AI 활용법' 강의가 1순위였죠. 이걸 바꿉니다. 첫 2주는 AI 없이 문제 정의와 가설 수립만 훈련시킵니다. 일부러 불편하게요. 그다음에야 같은 과제를 AI로 다듬게 하고, '내 초안과 무엇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발표시킵니다. 도구를 늦게 쥐여줄수록 도구를 더 잘 쓰게 된다는, 조금은 역설적인 설계입니다.
CNIL의 평가: '그대로 쓰는가, 따져 묻는가'를 본다
설계를 바꿨다면, 평가도 따라가야 합니다. 안 그러면 도로 원위치거든요. 사람은 평가받는 쪽으로 움직이기 마련이니까요.
프랑스 데이터보호기관 CNIL의 접근이 여기서 빛납니다. BCG에 따르면 CNIL은 관리자가 직원을 평가할 때 'AI를 잘 쓰는가'가 아니라 'AI의 결과물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가'(challenge AI outputs)'를 보도록 했습니다. 비판적 검증 능력을 성과관리 체계 안에 아예 넣은 거죠. 도구를 돌리는 손놀림이 아니라, 그 결과를 의심하고 따져 묻는 태도를 평가의 대상으로 삼은 겁니다.
이게 왜 중요할까요? 평가 기준이 곧 신호이기 때문입니다. '결과물만 빨리 내면 인정받는다'는 신호가 흐르는 조직에서 신입은 당연히 AI에 더 기댑니다. 빠르고 매끈하니까요. 반대로 '왜 이렇게 판단했는지, 어디를 의심했는지'를 묻는 조직에서는 따져보는 습관이 생존 전략이 됩니다.
평가에서 과정을 본다는 건, 사실 이 뉴스레터가 오래 강조해 온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지난 호 지금리더 < 누구를 승진시킬 겁니까 >에서 결과만 보지 말고 그 결과에 이른 의사결정의 질을 함께 보자고 말씀드렸죠. AI 시대의 평가는 이 원칙을 더 날카롭게 요구합니다. 매끈한 산출물은 이제 누구나 만들 수 있거든요. 그래서 차이는 '어떻게 거기까지 갔는가'에서만 드러납니다.
(예) D 팀장이 1on1에서 질문을 바꿉니다. 예전엔 "다 했어요?"였다면, 이제는 이렇게 묻습니다. "AI가 내놓은 답 중에 이건 좀 아닌데, 싶었던 부분 있어요?" 처음엔 신입이 당황합니다. "딱히... 다 맞는 것 같았는데요." 그래도 두세 번 반복하면 달라집니다. 다음번엔 "여기 숫자 출처가 좀 의심스러워서 따로 확인했어요"라는 답이 돌아오죠. 평가의 질문 하나가 직원의 사고방식을 바꾼 겁니다.
마무리
AI를 쓰지 말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정반대죠. 잘 쓰려고, 오래 쓰려고 순서를 바로잡자는 겁니다. 셸과 CNIL이 보여준 건 거창한 철학이 아니라 '순서를 바꾸고, 그 순서를 평가하는' 아주 실무적인 설계였습니다.
문제를 정의하는 근육은 저절로 자라지 않습니다. 자랄 자리를 일부러 남겨둬야 자라죠. 그 자리를 지켜주는 게, 결국 AI 시대 리더의 몫이 아닐까 합니다. 이번 주, 신입에게 맡길 과제 하나에서 '시작점'만 사람 손에 남겨보시길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