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문화를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가장 유용한 도구 중 하나가 바로 '경쟁가치모형(Competing Values Framework)'입니다.
이 모형은 1980년대 Quinn과 Kimberly가 개발한 것으로, 조직문화를 두 가지 축으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하나는 '유연성 대 안정성', 다른 하나는 '내부지향 대 외부지향'입니다. 이 두 축을 교차시키면 네 가지 문화 유형이 탄생합니다. (다소 오래됐지만, 비교적 간략하고 명시적이라 애용되고 있습니다)
위계문화(Hierarchy Culture): 내부지향적이고 안정과 통제를 중시합니다. 마치 잘 정비된 시계처럼 모든 것이 규칙과 절차에 따라 돌아갑니다. 전통적인 관료제 조직이 대표적이죠. "규칙을 따르세요, 그러면 모든 게 순조롭게 진행됩니다"라는 메시지가 중심입니다. 예) 인텔 앤디 그로브
관계문화(Clan Culture): 내부지향적이지만 유연성을 중시합니다. 마치 하나의 가족처럼 구성원들 간의 신뢰와 참여, 소통이 핵심입니다. "우리는 하나의 가족입니다"라는 메시지가 강조됩니다. 예) 파나소닉 마쓰시다 고노스케
시장문화(Market Culture): 외부지향적이며 안정과 통제를 중시합니다. 성과와 경쟁이 핵심 가치로, "결과가 모든 것을 말합니다"라는 메시지가 지배적입니다. 예) GE의 잭 웰치
혁신문화(Adhocracy Culture): 외부지향적이며 유연성을 중시합니다. 창의성과 변화, 도전이 핵심 가치입니다. "새로운 것에 도전하세요, 실패해도 괜찮습니다"라는 메시지가 중심입니다. 예) 테슬라 일론 머스크
여기서 중요한 점은 어떤 문화가 '옳다' 혹은 '그르다'고 단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성공적인 조직은 이 네 가지 문화의 균형을 적절히 유지(실상은 주된 문화를 유지)하면서, 환경 변화에 따라 특정 문화를 강화하기도 합니다.
최근 삼성전자는 일련의 '기본 수칙 강화' 조치를 시행했습니다. "슬리퍼는 자리에서만 신어야 한다", "패밀리데이와 일요일, 공휴일에 공유오피스 사용 금지", "보행 중 스마트폰 사용 금지" 등의 지침을 내렸습니다. 이는 경쟁가치모형으로 볼 때 전형적인 '위계문화' 강화의 모습입니다.
왜 삼성전자는 지금 위계문화를 강화하고 있을까요? 그 배경에는 뚜렷한 위기 상황이 있습니다. 최근 삼성전자는 주력 사업인 D램 시장에서 SK하이닉스에 점유율과 영업이익 모두 뒤처지는 상황에 직면했습니다. 올해 1분기에 SK하이닉스는 36%의 점유율로 D램 시장 1위에 올랐고, 삼성전자는 34%로 2위로 밀려났습니다. 영업이익도 SK하이닉스의 7조 4000억 원에 비해 삼성전자 DS 부문은 1조 1000억 원에 그쳤습니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조직이 보이는 전형적인 반응이 바로 '통제 강화'입니다. 마치 위급한 상황에서 지휘관이 "모두 명령에 따라 행동하라!"고 외치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조직이 외부 환경에서 통제력을 잃었다고 느끼면, 내부적으로라도 통제력을 회복하려는 본능적 반응이 나타납니다.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조치가 해법이 될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무엇을 하든 결정 기준은 '성과를 내는 데 도움(방해)가 되는가'가 돼야 합니다. 슬리퍼가 정말 방해가 됩니까?
가장 큰 위험은 혁신 역량의 약화입니다. 혁신은 본질적으로 규칙을 깨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하지만 삼성전자는 '큰 효과 없는' 규칙을 추가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혹시 윗분 보시기에 안 좋게 보여서 이런 행태를 보이는 것은 아닌지 안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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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삼성전자'를 여러 번 다루는 이유는 국민 기업이라 그렇습니다. 지인들이 많고, 주식도 많고, 경영계에 미치는 파급력이 매우 큽니다. 실제 '삼성전자에선 이런 거 한다더라'는 얘기가 퍼지면서 선진 경영 기법이 전파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삼성전자 배우기를 하는 곳은 거의 찾아 보기 어렵습니다. 하루 빨리 예전 모습을 찾아주길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