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기업에서 오롯이 책임을 지는 자리는 임원입니다. '임시 직원'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들에게 하루하루는 피말리는 의사결정의 순간이죠. 삼성과 SK 등 이미 대다수 대기업 임원들은 주말 없이 일하고 있습니다. 물론 당연하게 맞아들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선 그들은 (입사) 100명 중 1명이며, 그만큼 성취지향적이었고, 위험을 감내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좋은 연봉에 각종 혜택까지 생각하면 해볼만 하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내리는 결정은 깊은 고뇌가 담겨 있습니다. 때론 고뇌가 위험이 될 수 있습니다.
어제 모 기업 임원과 30분 넘게 통화했습니다. 최근 수익율이 좋은 한 고객사를 잃게 되서였습니다. 사실 해당 사업부를 맡기 전에 발생한 사안으로 그의 책임이 아니었습니다. 납품된 물품이 다른 기기에 물적 손해를 가져오면서 고객사가 클레임을 제기했습니다. 법률 검토를 통해 배상하자는 의견이 초기에 있었지만, CEO는 노발대발합니다.
임원 생각: '대표께서는 배상을 선호하지 않는군.'
대표 생각: '면밀한 검토 없이 배상부터 말하고 있어!'
표피적인 반응만 고려한 생각이었습니다. 대표는 합리적 근거가 있다면 배상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애초 초동 분석이 부실했던 것이고, 대표의 의중을 오해했습니다.
고객사와의 공방이 오고가고 제조물책임법에 의해 보험사에서 보험금 지급 여부를 판단하게 됩니다. 심사가 몇 개월이 소요되고 맙니다. 최근에 보험업계가 좋지 않습니다. 그래서 심사를 매우 꼼꼽하게 진행하며 지급을 거절하는 사례가 부쩍 늘었습니다. 임원은 보험금 지급을 예상했습니다. 다만, 연간 입찰 시기가 도래했습니다. 임원은 입찰 참여를 자신했고 입장의 변화는 없었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날벼락 같은 소리가 들렸습니다. 보험금 지급 불가 통보가 온 것이었습니다. 고객사는 지지부진한 진행에 불쾌감을 표시했고, 뒤늦게 대표가 나서서 무조건 보상을 약속했지만, 입찰 참여 기회를 받지 못했습니다.
임원 생각: '보험금만 나오면 모두 해결된다.'
고객 생각: '시일을 끄니까 내부적으로도 설득이 어렵다.'
상황이 복잡하지 않은 케이스입니다. 다만, 이럴 경우 선형적인, 단계적인 판단의 경로로 흐를 수 있습니다. '뭘 하면 잘 되겠지.', '이것만 해결되면 다음은 문제 없지.' 시간을 많이 소요(낭비)한다는 점, 하나가 무너지면 다 무너진다는 점이 문제입니다. 또한, 아쉽게도 제공 서비스의 우월성이 높은 수준은 아니었습니다. 입찰 참여를 레버리지로 삼기가 애초 불가능했다는 얘기입니다.
임원의 의사결정은 매우 중요합니다. 대표가 모든 결정의 전면에 나서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자기 의견이 있고, 그것을 관철하려고 노력했다면 어땠을까 복기해봅니다. 임원이라면 그 정도의 권한과 의무가 있습니다. 좌고우면하다가 돌아올 수 없는 막다른 길에 다다를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