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어느 기업을 가든 화두는 단연 인공지능(AI)과 디지털 전환이죠. 이사회와 대표이사는 "우리 회사도 전사적인 AI 혁신 과제를 발굴하라"고 연일 주문을 쏟아냅니다. 실무 부서에서는 수십억 원의 예산을 들여 생성형 AI 챗봇을 붙이고, 공정에 예측 알고리즘을 얹고, 고객센터에 자동 응답 솔루션을 도입하곤 합니다. 그런데 회의실 문을 닫고 경영진끼리 모여 앉으면 이런 탄식이 슬그머니 흘러나옵니다.
"그래서 이 AI 프로젝트들이 우리 회사의 다음 10년을 먹여 살릴 신사업이 됩니까?"
개인적으로는 현장에서 이런 답답한 토로를 마주할 때마다 깊은 아쉬움이 밀려오더군요. 수많은 기업이 디지털과 AI 전환이라는 거대한 파도 앞에서 길을 잃는 까닭은 기술력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물음 자체가 엉뚱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 익숙한 본업을 그저 컴퓨터 화면 속으로 옮겨 심는 일에 매달려 있는 것은 아닐까요? 맥킨지(McKinsey)의 디지털 전환 연구를 이끈 에릭 라마르와 케이트 스마예, 로드니 제멜의 조언이 대표적입니다. 이들은 기업의 디지털 변혁을 다룬 저서와 리포트에서 리더들에게 묵직한 경종을 울립니다. (Rewired 개정본을 읽고 있는데, 정말 좋은 내용이 많습니다. 곧(?) 소개하겠습니다 ^^)
"위대한 비즈니스 기회는 때때로 본업 밖에 존재합니다. 전환을 위한 비즈니스 도메인의 우선순위를 정할 때, 본업에 인접한 매력적인 새로운 디지털 또는 AI 기반 사업이 있을지 반드시 검토해야 합니다. 이를 제대로 해내려면 전략적 규율과 창의적 자유가 모두 필요합니다.
성공의 열쇠는 회사의 자산과 고객, 역량을 완전히 새로운 렌즈로 굴절시켜 바라보는 데 있습니다. 우리가 이미 하고 있는 일을 어떻게 디지털화할 것인가를 묻기보다는, 기존 비즈니스 모델에 얽매이지 않는다면 무엇을 만들어낼 수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저 역시 신사업 기획서를 검토할 때마다 매번 마주하는 기시감입니다만 ^^;)
1. 익숙함의 덫: 왜 하던 일의 디지털화는 공회전하는가
저는 여기서 단언컨대 한 가지 뼈아픈 진실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봅니다. 대부분의 기업이 추진하는 AI 혁신은 실상 혁신이라기보다 사무 자동화의 연장선에 머물러 있습니다. 조직 구성원에게 "AI 과제를 가져오라"고 지시하면 열에 아홉은 자신이 현재 매일 처리하는 일상 업무를 펼쳐놓습니다. 보고서 작성 시간을 20분 줄이는 방법, 불량품 검사 화면을 모니터링하는 작업, 고객 문의 메일을 자동 분류하는 도구 같은 일들이죠. 물론 이런 업무 효율화가 무가치하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다만 짚어야 할 지점은 분명합니다.
기존에 하던 일을 디지털 도구로 조금 더 빠르게 처리한다고 해서, 기업의 밸류에이션이 뛰거나 새로운 시장이 열리지는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비용을 3% 아끼는 개선은 가능할지언정, 새로운 매출 곡선을 그리는 도약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왜 이런 공회전이 반복될까요?
지난 호 아마존에는 'AX' 제목의 책이 없습니다에서 다루었듯이, 진정한 AX는 기술을 덧붙이기보다 비즈니스 모델 전체를 다시 설계하는 데서 출발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기술 도입을 목적으로 삼는 순간, 조직은 가장 안전하고 눈에 익은 자기 밥그릇 안에서만 기술의 쓰임새를 찾게 되기 십상입니다.
즉석카메라의 제왕이었던 폴라로이드(Polaroid)의 몰락 과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흔히 시장에서는 폴라로이드가 디지털 카메라 기술 개발을 게을리하다가 소니나 캐논에 밀려 망했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실상은 정반대였습니다.
폴라로이드는 이미 1980년대부터 수억 달러의 연구비를 쏟아부으며 센서와 디지털 이미징 원천 기술을 확보해 두었더군요. 마이크로프로세서와 이미지 프로세싱 분야에서 당대 최고 수준의 특허와 하드웨어 시제품을 보유한 기술 선도 기업이었죠. 그런데 막강한 기술을 쥐고도 회사는 파산으로 직행했습니다.
경영진의 사고방식이 기존 비즈니스 모델의 렌즈에 갇혀 있었던 탓입니다. 폴라로이드 경영진의 뇌리에는 면도기와 면도날 모델이 완고하게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카메라는 원가 수준으로 저렴하게 깔아주고, 고객이 사진을 찍을 때마다 마진 높은 필름을 사서 쓰게 하는 수익 구조였죠. 경영진은 디지털 기술을 손에 쥐고서도 오직 한 가지만 물었습니다.
"이 디지털 기술을 써서 어떻게 우리 본업인 필름과 인화지 인쇄 매출을 유지할 수 있을까?"
그 결과 디지털 사진을 컴퓨터 메모리에 저장하고 통신으로 공유하는 인접 생태계를 철저히 외면했습니다. 대신 디지털 카메라로 찍은 뒤 즉석에서 전용 인화지로 출력하는 기괴한 하이브리드 프린터에 집착했습니다. 기술이 모자라서가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이미 하고 있는 일(인화지 판매)을 어떻게 디지털화할까?"라는 좁은 물음에 갇혀 인접 영역의 광활한 디지털 생태계를 보지 못한 결과였습니다.
2. 굴절(Refraction): 기존 자산을 다른 각도로 비추는 법
그렇다면 본업 밖에서 인접 영역을 탐색한다는 말은 무작정 우리가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엉뚱한 분야로 뛰어들라는 뜻일까요? 절대 아닙니다. 제조업체가 갑자기 엔터테인먼트 회사를 차리거나, 건설사가 밑도 끝도 없이 게임 앱을 만들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여기서 등장하는 결정적인 개념이 바로 굴절(Refraction)입니다.
광학에서 굴절이란 빛이 다른 매질을 통과할 때 진행 방향이 꺾이면서 숨겨진 스펙트럼이 펼쳐지는 현상을 뜻합니다. 경영학에서 말하는 굴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이미 보유하고 있는 고유한 자산, 고객과의 깊은 접점, 현장에서 단련된 핵심 역량을 전혀 다른 매질인 디지털과 AI라는 렌즈로 비추어보는 작업입니다.
잠시 곁길로 새자면, 프리즘의 원리를 생각해 보면 무척 흥미롭습니다. 투명한 유리 삼각기둥 자체는 빛을 스스로 내지 못합니다. 단지 햇빛이 유리 안으로 진입하는 각도를 꺾어줌으로써, 백색광 속에 숨어 있던 빨강부터 보라까지의 찬란한 무지개를 눈앞에 드러내 보일 뿐이죠. 비즈니스 리더가 해야 할 일도 이 프리즘의 역할과 정확히 닮아 있습니다.
우리 조직이 수십 년간 쌓아온 핵심 자산은 이미 충분히 훌륭합니다. 문제는 그 자산을 오직 본업이라는 단 하나의 단면으로만 비추고 있다는 점입니다. 포스와 사에비(Nicolai J. Foss & Tina Saebi, 2017)의 비즈니스 모델 혁신 연구는 이 구조를 명료하게 뒷받침합니다. 두 학자는 Journal of Management에 발표한 논문에서 비즈니스 모델 혁신을 가치 제안, 가치 사슬 아키텍처, 가치 회수 메커니즘의 재조합으로 정의했습니다. 신기술 도입에 그치지 않고, 기업이 보유한 자산과 역량을 새로운 방식으로 결합할 때 비로소 비즈니스 모델의 진정한 도약이 완성된다고 짚었죠.
반면 기업의 핵심 자산을 새로운 렌즈로 굴절시킬 때, 비로소 전에 없던 새로움(Novelty)과 기존 자산과의 결합 효과인 상보성(Complementarities)이 폭발합니다. 세계 1위 농기계 기업인 존디어(John Deere)의 궤적을 보십시오. 만약 존디어가 "우리가 하던 농기계 제조를 어떻게 디지털화할까?"라는 질문에 머물렀다면 무엇을 만들었을까요? 아마도 터치스크린이 달린 계기판이나 연비가 조금 더 좋아진 전자제어 트랙터를 만드는 데 그쳤을 겁니다. 하지만 존디어는 질문의 방향을 완전히 틀었습니다.
"트랙터를 팔지 않는다면, 농부들이 씨를 뿌리고 수확할 때 겪는 가장 고통스러운 불확실성을 AI로 어떻게 없애줄 수 있을까?"
존디어는 백 년 넘게 트랙터를 팔며 쌓아온 고객 네트워크와 주행 데이터를 새로운 광학 렌즈에 통과시켰습니다. 그 결과 잡초에만 정밀하게 제초제를 분사하는 컴퓨터 비전 AI 농업 솔루션과, 토양 상태를 실시간 분석해 최적의 파종 경로를 안내하는 클라우드 구독 플랫폼이 탄생했습니다. 존디어는 이제 단순한 쇳덩이 기계 제조사가 아닙니다. 글로벌 농업 데이터 생태계를 장악한 인접 소프트웨어 플랫폼 기업으로 스스로를 재정의했습니다.
시가총액이 뛰고 기업의 체질이 완전히 바뀐 계기는 바로 이 자산의 굴절에 있었습니다. 국내 카드사와 캐피탈사의 행보에서도 이런 굴절의 위력을 엿볼 수 있습니다. 가맹점 수수료와 카드론 이자라는 전통 본업 수익에만 매달렸던 금융사는 빅테크의 간편결제 공세에 밀려 사면초가에 놓였습니다. 하지만 결제 데이터라는 핵심 자산을 인접 도메인으로 굴절시킨 리더는 길을 찾았습니다. 소상공인의 상권 분석과 매출 예측을 돕는 B2B 데이터 구독 서비스를 구축하고, 법인 고객의 공급망 결제 리스크를 실시간으로 스코어링해 주는 AI 리스크 관리 솔루션을 출시했죠. 수수료 장사라는 기존 비즈니스 모델의 굴레를 벗어던지자, 잠자고 있던 거래 데이터가 새로운 기업 고객을 끌어들이는 알짜 수익 자산으로 탈바꿈했습니다.
3. 전략적 규율과 창의적 자유: 인접 영역으로 건너가는 3가지 수순
그렇다면 우리 조직은 어떻게 이 여정을 시작해야 할까요? 맥킨지가 강조하듯, 인접 비즈니스를 개척하는 과정에는 고도의 전략적 규율(Strategic Discipline)과 대담한 창의적 자유(Creative Freedom)가 공존해야 합니다. 이 둘은 결코 모순되는 가치가 아닙니다. 전략적 규율이 빠진 자유는 허황된 아이디어 잔치로 끝나고, 창의적 자유가 없는 규율은 본업의 지루한 복사판을 낳을 뿐입니다. (물론 말이 쉽지, 당장 이번 분기 실적을 책임져야 하는 리더에겐 피를 말리는 줄타기겠지만요 ^^;) 현장의 리더 여러분께서 당장 실행에 옮겨볼 만한 3가지 실천 수순을 제안해 드립니다.
첫째, 질문의 공식을 바꾸는 워크숍을 설계해보시면 어떨까요?
리더십 회의나 전략 기획 세션에서 던지는 질문의 문법부터 완전히 뜯어고쳐야 합니다. "우리 부서 업무에 생성형 AI를 어떻게 붙일 것인가?"라는 질문은 회의실에서 금지어로 지정하길 권합니다. 대신 칠판에 다음 두 가지 질문을 크게 적어두고 백지상태에서 난상토론을 벌여보십시오.
첫째, "만약 내일부터 기존 제품을 공짜로 줘야 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가진 고객과 데이터로 어떤 새로운 가치를 팔아 돈을 벌 수 있겠는가?"
둘째, "우리 업계의 상식과 규범을 모르는 테크 스타트업이 우리 회사의 물리적 자산과 고객군을 손에 쥐었다면, 내일 아침 어떤 서비스를 론칭하겠는가?"
기존 마진 구조, 기존 영업 채널, 기존 조직 체계라는 보이지 않는 전제를 강제로 삭제해버릴 때, 비로소 구성원의 뇌리에 창의적 자유의 공간이 열립니다.
조직 내부의 암묵적 규칙을 의도적으로 지워버리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 보시기 바랍니다.
둘째, '도메인 집중'이라는 엄격한 전략적 규율을 확립해보시면 어떨까요?
자유로운 발상으로 여러 아이디어가 쏟아져 나왔다면, 그다음부터는 단호하고 냉정한 전략적 규율이 작동해야 합니다. 당장 경계해야 할 실패 패턴은 이른바 땅콩버터 전략입니다. 식빵 위에 얇게 땅콩버터를 펴 바르듯, 10개 부서에 예산을 몇억씩 골고루 쪼개어 주고 "각자 알아서 AI 신사업 과제를 해보라"고 방치하는 방식입니다. 이러면 1년 뒤 남는 결과는 파편화된 PoC(개념검증)의 잔해뿐입니다.
맥킨지의 연구진이 거듭 강조하듯, 변혁을 성공시키는 기업은 자원을 잘게 쪼개지 않습니다.
본업의 핵심 자산을 레버리지할 수 있는 단 1개, 많아야 2개의 고가치 인접 비즈니스 도메인을 집요하게 선별해 모든 화력을 집중합니다. 경제적 파급 효과(EBITDA 기여도)가 분명하고, 우리 회사가 가진 고유한 데이터나 고객 기반이 진입 장벽으로 작동할 수 있는 영역이어야 합니다. 선택되지 않은 9개의 매력적인 아이디어를 단호하게 쳐내고, 낙점된 하나의 도메인에 임원급 오너십과 전폭적인 예산을 몰아주는 결단이야말로 리더가 지켜야 할 전략적 규율입니다.
셋째, 신사업 부서에 '제도적 치외법권'을 허용해보시면 어떨까요?
인접 디지털 비즈니스를 발굴할 때 가장 흔하게 벌어지는 비극이 있습니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낸 뒤, 그 과제를 기존 본업 부서의 팀장에게 겸임으로 맡기거나 본업의 평가 잣대로 재단하는 경우입니다. (신사업 부서가 기존 사업부의 눈치를 보느라 기를 펴지 못하는 건 어느 조직이나 참 흔한 풍경입니다)
본업을 책임지는 관리자의 머릿속은 당장 이번 달 매출과 분기 영업이익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불확실한 인접 AI 비즈니스를 키워보라"고 하면, 당연히 위험을 회피하고 기존 사업의 연장선으로 축소해버립니다. 기존 사업의 관성으로부터 신사업을 지키는 양손잡이 조직(Ambidextrous Organization) 구조를 세워 주어야 합니다. 신사업 조직은 별도의 사내 벤처나 독립 태스크포스(TF)로 분리하고, 보고 체계 역시 최고경영자에게 직속으로 닿게 판을 짜 주십시오.
평가 지표 역시 본업의 잣대인 단기 ROI(투자자본수익률) 대신 고객 확보 속도, 플랫폼 인게이지먼트, 데이터 축적률 같은 새로운 선행 지표로 매겨야 합니다. 지난 호 [지금리더] 직원의 사고를 유지시켜라: J.P. Morgan에서 짚어보았듯, 현장의 창의적 실험이 방종으로 흐르지 않으면서 주체적으로 굴러가게 이끌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거버넌스 원칙과 독립성이 동시에 보장되어야 하죠. 기존 사업의 간섭으로부터 신사업의 싹을 보호하는 울타리를 쳐주는 일이야말로 리더의 가장 중대한 책무입니다.
에필로그: 렌즈를 바꾸면 비즈니스의 영토가 넓어집니다
글을 맺으며, 오늘 나눈 핵심 메시지를 다시 한번 가슴에 새겨봅니다. 혁신의 실패는 대개 기술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물음이 왜소하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우리가 지금 하는 일을 어떻게 디지털화할까?"라는 질문은 조직을 끊임없이 과거의 궤적에 묶어둡니다. "기존 비즈니스 모델에 얽매이지 않는다면, 우리가 가진 자산으로 무엇을 새롭게 창조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은 미래의 영토를 열어젖힙니다.
어찌 보면 뼈아픈 역설입니다. 가장 위대한 다음 세대의 비즈니스 기회는, 우리가 그토록 애지중지하며 지켜온 본업의 울타리 바로 바깥에 숨죽이고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지금 손에 쥐고 있는 익숙한 사업 렌즈를 한번 내려놓아 보십시오.
우리 조직이 가진 자산과 고객, 인재를 완전히 새로운 각도의 프리즘에 통과시켜 보시기 바랍니다. (리더의 숙명이란 결국 이런 엇박자를 온몸으로 받아내며 새 길을 내는 자리인가 봅니다 ㅜ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