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책이 없는데 제가 어떻게 사람들을 움직이나요?"
실제 비직책자인 중간급 직원들에게 많이 듣는 질문입니다. 매트릭스 구조와 애자일 스쿼드가 보편화되면서, 팀장 완장을 차지 않은 실무자가 유관 부서 동료나 심지어 직급이 한참 높은 선배를 설득해 성과를 내야 하는 국면이 부쩍 늘었거든요. 사실 인사권도 평가권도 없는 상태에서 협업을 끌어내기란 참으로 힘에 부치는 일입니다. 조금만 강하게 드라이브를 걸어도 밉보이기 십상이고, 그렇다고 손 놓고 있자니 프로젝트 일정은 끝없이 밀리죠. ㅜㅜ
하지만 냉정하게 따져보면, 조직을 실질적으로 움직이는 힘은 명함 속 직책에서만 나오지 않습니다. 공식 권한이 없어도 탁월한 성과를 내며 동료의 자발적인 협력을 끌어내는 이들은 과연 무엇이 다를까요?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의 팟캐스트 HBR IdeaCast: How People Without Formal Power Gain Influence에서 사회적 관찰 전문가 파멜라 마이어(Pamela Meyer) 대표가 제시한 비직책자의 영향력 기술을 짚어보고자 합니다.
공식 권한이 멈추는 곳: 심리적 저항과 비공식 네트워크의 힘
비직책 실무자가 다른 부서나 동료를 설득하려 할 때 흔히 범하는 실수가 있습니다. 상위 임원의 이름을 빌리거나 마감 기한으로 상대를 압박하는 식이죠. "임원 보고 건이라 이번 주까지 꼭 해주셔야 합니다", "본부장님 지시인 거는 아시죠?"라고 다그치지만, 상대는 겉으로 고개를 끄덕일 뿐 슬그머니 발을 뺍니다. 공식 권한이 없는 상태에서 가하는 직접적 압박은 필연적으로 심리적 저항(Psychological Reactance)을 부르기 마련이거든요.
자기결정성 이론(Self-Determination Theory)을 곱씹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유능감, 관계성과 더불어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선택하고자 하는 자율성(Autonomy) 욕구가 내재해 있습니다. 누군가 위에서 내리누르듯 요구하는 순간, 사람은 자신의 통제권을 침해받았다고 직감하죠. 제안의 타당성을 떠나 통제당하지 않으려는 방어 기제가 먼저 발동하는 셈입니다.
다니엘 브라스(Daniel J. Brass)와 말린 버크하트(Marlene E. Burkhardt)가 Academy of Management Journal에 발표한 연구(1993)는 눈여겨볼 사실을 보여줍니다. 조직 내 실질적인 권력과 영향력은 공식 직위보다 비공식 네트워크 내 중심성(Network Centrality), 즉 정보와 관계의 중심에 얼마나 자리 잡고 있는가에 훨씬 크게 좌우되더군요. 공식 직책이 잠재적 권한에 불과하다면, 실제 일을 되게 만드는 동력은 정보의 흐름을 잇고 상호 의존성을 조율하는 관계적 위치에서 싹틉니다. 직책이 없어도 네트워크의 중심에 서면 얼마든지 흐름을 주도할 수 있다는 뜻이죠.
파멜라 마이어는 비직책자의 영향력이란 자신을 과시하는 연출(Performance)이 아니라 주변 역학과 동료의 결핍을 읽어내는 관찰(Observation)에서 출발한다고 강조합니다. 말을 앞세우기보다 회의실의 역학을 먼저 감지하는 사람이 주도권을 쥡니다.
현장을 읽는 5가지 경로: 비직책자가 영향력을 발휘하는 실전 프레임워크
그렇다면 공식 권한이 없는 실무자는 현장에서 어떻게 영향력을 발휘해야 할까요? 마이어 대표는 HBR 기고문(Five Ways to Wield Influence When You Lack Authority)에서 권한 없이도 조직을 움직이는 5가지 전략적 경로를 제시합니다.
첫째, 숨은 실세를 짚어내는 영향력 포착자(Influence Spotter)입니다. 초보 실무자는 직급이 가장 높은 사람만 바라봅니다. 반면 노련한 실무자는 조직도 너머에 존재하는 비공식 권력을 기민하게 읽어내죠. 회의실에서 쟁점이 불거질 때 동료의 시선이 누구에게 쏠리는지 유심히 살펴보십시오. 발언은 임원이 독점하더라도 실질적 동의를 구하는 대상은 현장의 베테랑 수석일 수 있습니다. 사슬 분석(Chain Analysis)으로 의사 결정권자의 귀를 쥐고 있는 숨은 조언자를 파악하고, 그가 겪는 실무 고민을 덜어줄 데이터와 관점을 선제적으로 건네며 신뢰를 쌓아야 합니다.
둘째, 교착 상태를 푸는 막후 소통자(Backchanneler)입니다. 부서 간 이해관계가 충돌해 공식 회의가 겉돌 때, 회의실 안에서 억지로 담판을 지으려 들면 감정의 골만 깊어집니다. 이때 막후 소통자는 회의가 끝난 뒤 갈등 당사자를 조용히 찾아가 비공식 통로를 엽니다. "아까 회의 때 말씀이 다 안 끝난 것 같았는데, 우려하시는 지점을 조금 더 듣고 싶었습니다"라며 경청하죠. (물론 사적 채널을 지나치게 오래 유지하면 사내 정치꾼으로 오해받을 수 있겠지만요.) 막후에서 엇박자를 조율했다면 즉시 비공식 채널을 닫고 공식 테이블로 안건을 올려 공론화해야 합니다.
셋째, 때를 기다리는 정밀한 타이밍 조율자(Precision Mover)입니다. 권한이 없을수록 영향력의 성패는 타이밍에 달려 있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기획안이라도 조직이 위축되어 있거나 상대가 피로에 찌든 순간에 들이밀면 튕겨 나가기 십상이죠. 타이밍 조율자는 충동적으로 제안하지 않고 시간의 창(Time Window)을 치밀하게 계산합니다. 분기 실적 마감 직후처럼 주요 의사 결정의 틈새가 열리는 구간을 포착해 안건을 꺼내는 식입니다. 평소 유관 부서와 상사의 업무 사이클과 컨디션을 살피며 최적의 순간을 기다리는 감정 조절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넷째, 가치를 매개로 엮어내는 가치 기반 연결자(Connector)입니다. 가치 기반 연결자는 부서 간 고립(Silo)을 꿰뚫어 보고 다리를 놓아줍니다. 단순히 밥 한번 먹자며 안부나 묻는 피상적 교류는 되레 상대에게 부담만 얹어줄 뿐입니다. 진정한 연결자는 양쪽 모두에게 명확한 실익이 생겨나는 교집합을 엮어냅니다. 예컨대 마케팅 팀의 고객 데이터 분석 니즈와 개발 팀의 신규 기술 스택 검증 수요를 맞물려 공동 과제로 물꼬를 터줄 때, 비직책자의 영향력은 단단하게 뿌리내립니다.
다섯째, 조직의 온도를 감지하는 기류 판독자(Pulse Reader)입니다. 기류 판독자는 회의실 공기가 협력적인 확장 상태인지 방어적인 수축 상태인지 민감하게 감지합니다. 펩시코 전 CEO 인드라 누이가 핵심 임직원 400명의 부모에게 직접 편지를 써서 노고를 기린 일화는, 사람들이 마음속 깊이 품은 인정 욕구를 꿰뚫어 본 대표적 장면이죠. 기류 판독자는 회의가 공회전할 때 "지금 결정을 망설이는 진짜 이유가 개발 일정 불안 때문 아닐까요?"처럼 아무도 입 밖에 내지 못한 본질적 병목을 짚어내 교착을 깹니다.
회의실에 들어가기 전 판도를 바꾸는 법: 트리플 B 준비법과 5가지 실천 가이드
비공식 영향력은 타고난 말재주나 카리스마의 영역이 아닙니다. 마이어 대표는 상대와 마주하기 전 맥락을 분석하는 트리플 B(Triple B) 준비법을 제안합니다.
- 배경(Background): 상대의 커리어 궤적, 과거의 성공과 실패 경험, 담당 업무의 고충을 파악합니다.
- 행동(Behavior): 거시적 비전형인지 꼼꼼한 세부 실행형인지, 직설적 발언형인지 신중한 관찰형인지 소통 패턴을 살핍니다.
- 신념(Beliefs): 상대가 사수하려는 핵심 가치(안정성, 효율성, 전문성 등)와 심리적 위협 요인을 짚어봅니다.
비직책 실무자와 리더 여러분이 현장에서 즉시 적용할 수 있는 5가지 실천 수순을 정리해 드립니다.
- 회의실 문을 열기 전 5초간 멈추십시오(Pause).
무슨 말을 쏟아낼지 고민하기 전에,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참석자의 표정과 좌석 배치, 시선의 흐름을 먼저 훑으십시오.
- 요구하지 말고 질문으로 상대의 자율성을 깨우십시오.
"이렇게 처리해 주세요" 대신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선배님의 전문 분야에서는 어떤 방식이 가장 효과적일까요?"로 주도권을 건네십시오.
- 막후 소통으로 푼 문제는 공식 테이블에서 꽃피우십시오.
비공식 대화로 이견을 좁혔다면, 본 회의에서는 상대가 직접 대안을 발제하도록 무대를 양보하십시오.
- 타이밍을 시간의 창으로 가늠하십시오.
마감에 쫓겨 날 서 있는 시점을 피해, 유관 부서의 업무 사이클과 상대의 심리적 여유 구간을 포착해 제안하십시오.
- 단순한 친교를 넘어 실질적 가치를 연결하십시오.
내 일만 밀어붙이지 말고, 양측 모두에게 확실한 쓸모가 생기는 접점을 찾아 협업의 장을 마련하십시오.
직책이라는 이름표가 없어도 조직의 방향을 바꾸는 실무자는 어디에나 있습니다. 자리가 권력을 보장해 주지 않듯, 권한의 부재가 무기력을 정당화하지도 않습니다. 무대 위에서 목소리를 높이기보다 무대의 흐름을 읽고 동료의 쓸모를 받쳐주는 사람이 결국 조직의 중심에 섭니다. |